어제에 남긴 이름
이름을하나두고오다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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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 4명
이정아직 문 연 분식집 주인
박철지하 짐만 나르는 사람
김한수철거 업체 야간 경비
오미란길고양이 밥 주는 사람목차 · 17화
1화
📍 지하 철문 · 밤 · 그 사이 한 시간도 채 안 됨
밤 열한 시, 철거를 하루 앞둔 중앙상가 지하 철문 앞이었다. 이정과 박철, 김한수, 오미란이 각자 다른 일로 이 건물에 남아 있었고, 발치 신문은 어제 날짜였다. 동네 소식면 오른쪽 아래 이름 칸만 비어 있었다. 이 지하에서는 신문을 펴도 어제 것만 나온다는 말이 예전부터 있었다.
위층 안내 방송이 짧게 울리자 철문이 바람에 밀려 닫히기 시작했다.
이정은 젖은 계단 쪽으로 달렸다.
박철은 닫히는 철문에 어깨를 넣었다. 철판이 멈추지는 않았지만, 한 사람 지나갈 틈은 남았다. 그는 이정이 첫 계단을 밟기 전에 발뒤꿈치로 떠밀린 통 하나를 옆으로 밀어냈다. 이정은 미끄러지지 않고 위로 올라갔다.
이정은 자기 가게가 있는 층까지 올라가 스위치를 찾았다. 방송은 거기서 끊겼고, 복도 형광등도 하나씩 꺼졌다. 그런데 전기실 문의 손잡이에는 낯선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잠겨 있었다. 이정은 열쇠가 없는 문 앞에서 잠깐 서 있다가, 우편함 옆 벽에 같은 동네 소식면만 떼어 붙인 흔적을 보았다. 테이프 자국만 남아 있었다.
박철은 어깨로 문을 버티며 발끝으로 신문을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 신문은 물 위에서 미끄러져 그의 작업화 앞에 멈췄다. 철문 틈 너머 창고 바닥에는 어제 날짜의 신문 더미가 쌓여 있었다. 그 더미 맨 위 장도 바깥것과 똑같이, 이름 칸이 비어 있었다.
김한수는 철문은 잡지 않고, 발목 물 위 신문을 소리 없이 집어올렸다.
"이 종이, 치울게요."
오미란은 차가운 물에 무릎을 굽히고 신발 앞의 신문을 집었다. 두 손으로 동네 소식면만 찢어 카디건 주머니에 넣었다.
김한수의 손에는 물에 젖은 나머지면만 남았다. 기사 본문을 훑는 순간, 낯선 이름 세 글자가 스쳐지나갔다. 손끝이 멈추기 전에 글자는 물 번짐 속으로 사라졌다.
이정이 내려올 때 계단 물에 발이 미끄러졌다. 그는 난간을 붙잡았지만, 손바닥이 계단 모서리에 닿으며 피부가 갈라졌다. 아래에서는 이미 신문을 두고 네 사람의 손이 겹친 뒤였다.
박철이 어깨를 빼지 않은 채 고개를 들었다. 창고 더미 맨 위 신문의 빈 이름 칸에, 연필로 그은 것 같은 흔이 스스로 번져 있었다. 칸은 비어 있었지만, 흔은 눈에 보일 만큼 진해져 있었다.
철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다만 주머니속 찢긴 종이에서, 오늘 처음 들리는 인쇄 소리가 났다.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2화
📍 지하 철문 · 밤 · 그 사이 한 시간도 채 안 됨
지하 철문 앞이었다. 방송은 이미 끊긴 뒤였고, 복도 불은 대부분 꺼져 있었다. 박철 어깨 너머 철문은 반쯤 열린 채 멈춰 있었고, 창고 쪽 형광등만 늦게 깜빡였다. 이정은 갈린 손바닥을 주먹으로 감싼 채, 더미 맨 위 신문의 빈 이름 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박철은 어깨를 더 밀어넣었다. 철판 사이 틈이 한 뼘 넓어지자, 그는 창고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
오미란도 몸을 낮췄다. 같은 더미, 같은 맨 위 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박철의 장갑 낀 손이 먼저 신문 전체를 집어올렸다. 종이가 접히는 소리가 났다. 그는 그것을 작업복 안쪽으로 밀어넣었다.
오미란 손끝은 겉면 뉴스면만 스쳤다. 찢어지지 않았다. 손가락 끝에 잉크 자국만 남았다.
김한수는 박철이 벌린 틈으로 미끄러져들어갔다. 몸을 낮춘 채 더미 앞에 무릎을 꿇고, 손전등을 빈 이름 칸에 바짝 댔다.
빛 아래에서 칸 안의 흔이 움직였다. 비어 있는 칸이었지만, 잉크가 스스로 번지며 세 글자가 잠깐 선명해졌다.
박은재.
김한수는 숨을 삼켰다. 칸 안쪽이 아니라, 바로 옆의 기사 본문에도 같은 세 글자가 어제 날짜와 함께 한 줄 더 인쇄되어 있었다. 손전등을 옮기자 두 줄이 같은 박자로 겹쳐 보였다.
이정은 가방 안쪽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지 않았다. 손바닥이 아파서였다. 대신 눈만으로 맞춰보았다. 가방속 면 오른쪽 아래 칸과, 방금 박철이 거두어간 신문의 빈 칸. 연필 흔의 번짐 방향까지 같았다.
같은 칸이었다.
창고 바닥 물 위에서 인쇄 소리가 났다. 오미란 주머니속 찢긴 뉴스면에서였다. 아까보다 또렷했다. 한 번, 또 한 번. 사람 손이 거치지 않은 박자였다.
이정은 고개를 들었다. 박철 작업복 안쪽에서 종이가 살짝 부풀어오른 윤곽이 보였다. 김한수는 손전등을 끄지 않은 채 수첩을 꺼냈다. 첫 장은 아직 비어 있었다.
철문 틈은 조금 좁아져 있었다. 박철 어깨가 더 깊이 박혀 있었다. 형광등이 한 번 길게 깜빡인 뒤, 창고 더미 둘째 장 맨 위의 빈 이름 칸에 새 흔이 스스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3화
📍 지하 철문 · 밤 · 그 사이 한 시간도 채 안 됨
밤, 지하 창고 더미 둘째 장 앞이었다. 넷은 형광등 아래로 조금씩 벌어져 섰고, 박철의 작업복 가슴 안쪽 종이 윤곽은 이전보다 더 도드라져 있었다. 오미란의 카디건 주머니에서는 아까까지 간헐적이던 인쇄 소리가 한 번 더 울린 뒤, 그대로 멈추었다.
철문 쪽 바람이 차게 밀어왔다. 반쯤 열린 철판 사이의 틈이 스스로 좁아지기 시작했다.
이정은 갈린 손바닥을 주먹으로 감싼 채, 둘째 더미 맨 위 장 모서리를 손가락으로 들춰올리려 했다. 같은 순간 오미란의 두 손이 그 겉장을 잡고 당겼다.
종이가 한 번에 움직였다. 이정의 손끝은 종이에 닿지 못했지만, 윗장과 바로 아래 장의 빈 이름 칸이 어긋나 보였다. 칸 안 번짐 방향은 같았다.
오미란은 동네 소식면 가장자리만 두 손으로 찢어 주머니에 넣었다.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주머니 안쪽에서 「서말순」 세 글자가 새로 찍히는 느낌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더미 겉장에는 뉴스면 한 줄 너비의 찢긴 자국만 남았다.
박철은 손전등 빛을 등지고 철문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작업복 안에서 접힌 신문을 조금 꺼내, 장갑 끝으로 빈 이름 칸을 눌렀다. 봉투에서 외운 문장이 한 획씩 옮겨졌다.
「이 골목은 원래 없었다.」
칸이 다 차자, 창고 벽의 낡은 중앙상가 안내판 글씨가 동시에 흐려졌다. 복도 쪽에서 간판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무도 그쪽을 건드리지 않았다.
김한수는 손전등을 수첩의 첫 장에 너무 가까이 댔다. 빈 칸에서 본 세 글자를 옮기려던 순간, 종이에서 그을린 냄새가 났다. 수첩 첫 장 가운데가 검게 타들어갔다. 「박」자 획 하나만 남고 나머지는 재가 되었다.
그 냄새에 박철이 고개를 돌렸다.
이정은 그 시선을 받았다. 박철의 장갑 끝에는 잉크가 묻어 있었고, 작업복 안 신문 겉면의 빈 칸에는 낯선 문장이 채워져 있었다. 이정은 가방 안쪽면과, 방금 어긋난 둘째 더미 아래 장 칸을 다시 맞춰보았다. 번짐 방향이 같았다. 손끝은 종이에 닿지 못했지만, 칸에 흐린 자기 가방 것과 같은 쪽으로 번지고 있었다.
철문 틈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너비만 남았다. 둘째 더미 맨 위 빈 이름 칸에는 연필로 그은 것 같은 획이, 멈춘 인쇄 소리 대신 스스로 올라오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4화
📍 중앙상가 복도 · 밤 · 그 사이 십 분 남짓
이정은 둘째 더미의 이름 칸에서 획이 번지는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지하 철문 안쪽에는 박철과 김한수, 오미란이 함께 있었다. 철판은 네 사람의 몸이 스칠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박철은 작업복 안의 신문을 왼손으로 누르고 철문에 어깨를 밀어 넣었다. 철판이 멎었다. 그는 이정이 지날 자리를 남긴 채 복도로 한 발 내디뎠다.
박철이 힘을 더 주자 철문 아래의 레일이 휘었다. 철판과 바닥 사이가 벌어져 바깥에서 쇠지렛대를 넣을 자리가 생겼다. 작업복 속 신문은 드러나지 않았다.
김한수는 그을린 수첩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젖은 신문의 나머지 면을 왼손으로 가리고 보이는 두 글자를 오른손으로 눌러 적었다. 그러면서 몸을 옆으로 돌려 철문을 빠져나갔다.
김한수가 복도에 닿아 손을 펼쳤다. 수첩에는 아무 글자도 없었다. 대신 손바닥에 ‘은재’가 거꾸로 찍혀 있었다.
김한수는 젖은 면을 다시 폈다. 박은재가 실린 기사 위의 날짜가 어제에서 삼십 년 전으로 바뀌어 있었다. 물에 번진 숫자였지만 연도는 분명했다.
오미란은 철문 밖으로 빠져나가 두 손으로 철판 끝을 잡았다. 박철의 어깨가 빠진 뒤에도 문은 닫히지 않았다. 그녀가 버틴 사이 이정이 문턱까지 왔다.
이정이 다시 둘째 더미를 돌아보았다. 이름 칸의 획은 가방 속 면보다 먼저 짙어져 있었다. 박철이 어깨를 더 낮췄고 오미란은 철판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이정은 두 사람 사이로 복도에 나왔다.
오미란은 마지막으로 손을 놓은 뒤 떨어진 간판을 뒤집었다. 뒷면에는 철거 사무실 명함이 테이프로 붙어 있었다. 도기석이라는 이름을 읽자 박철이 작업복 앞을 세게 눌렀다.
박철이 문에서 물러나자 철판이 레일을 긁으며 끝까지 닫혔다. 둘째 더미의 이름 칸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휘어진 아래 레일만 복도 쪽에 남았다.
김한수는 닫힌 철문을 돌아보았다. 안쪽에서 신문이 세 장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네 사람은 모두 중앙상가 복도에 서 있었다.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 풀렸다 · 기사 본문에 스친 낯선 이름
5화
📍 중앙상가 복도 · 밤 · 그 사이 몇 분
이정은 위층에서 내려오는 구두 소리가 가까워지자 고개를 들었다. 밤의 중앙상가 복도에는 네 사람이 닫힌 지하 철문과 계단 사이에 서 있었다. 철문 안에서 신문 한 장이 넘어가고 도기석의 구두가 한 계단을 밟았다.
이정은 두 소리가 번갈아 울린다는 것을 알아챘다. 도기석이 움직이면 종이가 잠잠했고 그가 멈추면 창고 안에서 다음 장이 넘어갔다. 사람의 걸음에 맞춰 잠긴 창고의 신문이 움직일 까닭은 없었다.
박철은 떨어진 간판 앞에 먼저 몸을 낮췄다. 김한수도 같은 순간 명함을 잡으려 들었다. 거친 장갑과 잉크 묻은 손바닥이 테이프 위에서 겹쳤지만 박철이 명함을 떼어 장갑 안으로 말아 넣었다.
김한수는 빈 오른손을 펼쳤다. ‘은재’를 옮겨 찍을 종이는 얻지 못했다. 대신 도기석이 계단을 내려설 때 들린 구두 밑창을 보았다. 밑창의 무늬는 삼십 년 전 기사에서 번진 중앙상가 상호와 같았다.
오미란은 계단을 올라가 도기석을 먼저 맞았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복도 반대편을 가리켰다.
"박철 씨라면 방금 뒷문으로 나갔어요."
도기석은 계단 중간에서 멈췄다. 시선이 뒷문 쪽으로 돌아간 동안 박철이 두 계단을 올라가 앞을 막았다.
"약속은 위에서 확인하죠, 도기석 씨."
박철은 굽은 허리를 펴 도기석과 계단 너비를 나눠 가졌다. 오미란이 만든 잠깐의 망설임이면 충분했다. 도기석은 복도도, 작업복 안의 신문도 보지 못한 채 몸을 돌렸다. 떨어진 간판에도 닿지 못했다.
오미란은 도기석이 뒷문 쪽으로 향할 때까지 손을 내리지 않았다. 거짓말은 통했지만 오래가지는 않을 터였다. 뒷문에는 박철이 없었다.
이정은 벽에서 마른 가루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흐려져 있던 중앙상가 안내판의 글씨가 지워지고 있었다.
계단 표시는 남았다.
점포 번호도 남았다.
하지만 「중앙상가」 네 글자는 완전히 사라졌다. 건물은 그대로 서 있는데 안내판에는 이제 이곳의 이름이 없었다.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 풀렸다 · 벽 안내판 글씨 흐림
6화
📍 상가 뒷골목 · 밤 · 그 사이 몇 분
오미란이 뒷문의 빗장을 올렸다. 문밖은 비 내리는 상가 뒷골목이었다. 찬 빗물이 문턱까지 튀었고 거짓말을 확인한 도기석이 안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도기석은 박철이 없는 골목을 한 번 더 보고 복도로 들어왔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작업복 안에 든 신문부터 내놓으시오."
이정은 뒷문으로 이어지는 길목을 막았다. 웃으면 사라지던 눈은 그대로 뜬 채였다.
"찾는 사람이 여기 없었다고, 아무 데나 들어가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
도기석은 이정의 어깨를 밀지 못했다. 대신 가방을 가리키며 종이를 내놓으라고 따졌고 그 사이 박철이 어두운 복도를 가로질렀다.
오미란은 박철보다 먼저 골목으로 뛰어나갔다. 어둠을 향해 팔을 뻗었다.
"박철 씨, 거기 서요!"
박철은 그 부름을 듣자 발을 멈추지 않았다. 오미란이 뒷문을 끝까지 열어 길을 비웠고 그는 도기석보다 먼저 문밖으로 나갔다. 장갑 안에 감춰 두었던 명함을 펴 보였다.
"약속을 지킬 생각이면 따라오시오."
도기석은 명함을 확인하려고 골목으로 나왔다. 박철이 한 걸음 물러날 때마다 오미란은 반대편에서 길을 좁혔다. 두 사람이 함께 움직이자 도기석은 뒷문에서 멀어졌다.
오미란은 곧바로 문을 반쯤 닫았다. 이정이 안쪽 문턱을 차지했고 도기석은 골목에 남았다. 이제 상가로 돌아가려면 둘 중 하나를 밀어내야 했다. 도기석은 철문도, 박철의 작업복도 볼 수 없었다.
김한수는 세 사람이 도기석을 밖으로 이끄는 동안 빈 가게 안으로 몸을 숨겼다. 아무도 지하 철문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는 젖은 신문을 계산대에 펴고 손전등을 옷자락으로 가렸다.
김한수는 기사 본문에서 박은재를 다시 찾았다. 그을린 수첩 첫 장의 검은 구멍 옆에 세 글자를 천천히 옮겼다.
「박은재」
먹물이 종이에 남았다. 문질러도 번지지 않았다.
김한수는 수첩을 접어 골목으로 나왔다. 그때 도기석이 빗물 고인 바닥을 밟았다. 구두 밑창의 무늬가 젖은 시멘트에 찍혔다.
「중앙상가」
복도 안내판에서 사라진 이름이 도기석의 발밑에는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 풀렸다 · 도기석 구두 밑창의 옛 중앙상가 상호 무늬
7화
📍 상가 뒷골목 · 밤 · 그 사이 몇 분
이정은 굵어진 빗물이 구두 자국의 마지막 획을 씻는 동안 가방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밤의 상가 뒷골목에는 네 사람과 도기석이 흩어져 있었다. 반쯤 열린 뒷문으로 찬 기운이 들이쳤다.
박철은 도기석이 철거반장 번호를 누르자 손목을 붙잡았다. 도기석이 팔을 빼려 했지만 거친 장갑이 손목을 바닥 가까이 눌렀다.
"전화는 그쪽부터 찍으시오."
박철은 휴대전화의 카메라를 빗물이 고인 시멘트로 향하게 했다. 화면 안에서 「중앙상가」의 마지막 글자가 흔들렸다. 엄지로 촬영 표시를 누르는 순간 사진 한 장이 저장됐고 철거반장에게 걸던 전화는 끊겼다.
김한수는 젖은 신문을 들고 두 사람 옆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빗물이 글자를 빠르게 씻어 어느 발자국을 눌러야 할지 가릴 수 없었다.
오미란은 김한수의 손목을 잡아 가장 선명한 구두 자국 앞으로 끌었다.
"한수 씨, 저 사람 말고 발밑부터 적어요."
김한수는 수첩 대신 젖은 신문을 펼쳤다. 박은재가 실린 기사를 피해서 빈 아랫부분을 구두 자국 위에 눌렀다. 오미란이 손목을 붙잡아 준 덕에 종이는 빗물에 밀리지 않았다.
김한수가 곧바로 신문을 걷었다. 젖은 종이에는 「중앙상가」 네 글자가 뒤집혀 찍혀 있었다. 박은재의 기사와 삼십 년 전 날짜도 찢어지지 않고 남았다.
오미란은 김한수의 손목을 놓은 뒤 골목 입구로 물러나는 도기석을 따라갔다. 도기석은 휴대전화를 되찾았지만 다시 전화하지 못했다. 박철이 바로 옆에 붙어 있었고 화면에는 방금 찍힌 사진이 떠 있었다.
이정은 가방 안에서 종이 스치는 소리가 나자 지퍼를 조금 열었다. 동네 소식면은 빗물이 스민 부분만 축축했다. 그런데 연필로 적힌 이름은 번지지 않았다. 젖은 자리 안에서 전보다 짙어져 있었다.
오미란은 이정이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을 보고 돌아섰다.
"괜찮아요?"
이정은 대답하지 않고 지퍼를 닫았다. 그 사이 바닥의 「중앙상가」는 빗물에 완전히 지워졌다. 같은 이름은 도기석의 휴대전화와 김한수의 젖은 신문에만 남았다.
도기석은 골목 입구에서 갑자기 번진 불빛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철거 업체 화물차 한 대가 후진 경고음을 내며 들어오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올 차였다.
철거차 운전자는 창문을 내리고 휴대전화 지도를 내밀었다. 골목은 눈앞에 있었지만 화면에는 중앙상가의 주소가 나오지 않았다. 화물차는 엔진을 켠 채 뒷골목 입구를 막기 시작했다.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 풀렸다 · 빗물에 찍힌 중앙상가 네 글자
8화
📍 지하 철문 · 밤 · 그 사이 몇 분
오미란은 철거 차량의 창문을 두드렸다. 밤의 상가 뒷골목에는 후진 경고음이 울렸고 반쯤 열린 뒷문 앞까지 차량의 불빛이 들어왔다.
"주소도 없는 건물을 무슨 수로 철거해요?"
운전자는 지도와 건물을 번갈아 보았다. 도기석이 끼어들기 전에 오미란은 골목 반대편을 가리켰다. 철거 차량은 끝내 앞으로 빠졌지만 운전자는 작업 지시서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확인하고 작업하겠습니다."
이정은 운전자가 접은 지시서를 펴는 순간 날짜를 읽었다. 오늘 작업할 서류인데 적힌 날짜는 어제였다. 철거 대상 주소 칸은 비어 있었다. 운전자는 이정의 시선이 머무는 곳을 알아채고 종이를 뒤집었다.
박철은 반쯤 열린 뒷문을 어깨로 밀어젖혔다. 오미란의 말과 달리 그는 반대편으로 가지 않았다. 중앙상가 복도를 가로질러 지하 철문 앞에 닿았고 장갑 낀 손을 휘어진 아래 레일에 넣었다.
박철은 허리를 낮추고 철문의 무게를 어깨로 받았다. 한 번 버텨 본 문이었다. 아래쪽이 레일에서 들리자 몸 하나가 지나갈 자리가 열렸다. 그는 철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김한수는 젖은 신문을 품에 넣고 뒤따랐다. 계단을 두 칸씩 내려왔지만 철문 아래를 지날 때 신문 끝이 빠져나왔다. 젖은 종이가 레일과 철문 사이에 물렸다.
김한수는 몸을 창고 안으로 밀어 넣지 못했다. 신문이 찢어지지 않게 붙잡자 문턱에 무릎이 닿았다. 대신 열린 자리 너머로 더미 맨 위 날짜가 보였다. 조금 전 이정이 본 작업 지시서와 같은 날짜였다. 둘 다 오늘이 아니라 어제였다.
오미란은 김한수 옆에 몸을 낮췄다. 운전자는 거짓말을 확인하겠다며 복도까지 따라왔다. 그녀는 손을 뻗지 못한 채 창고 더미를 살폈다.
오미란은 「서말순」이 찍힌 동네 소식면을 찾았다. 맨 위에는 없었다. 하루 전 날짜가 적힌 신문을 한 장 더 들춰야 닿는 자리였다. 어머니의 이름은 오늘로 올라오지 못하고 어제 아래에 끼어 있었다.
이정은 마지막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운전자가 뒤에서 작업 지시서를 말아 쥐었다. 그때 뒷골목에서 쇳덩이가 내려앉는 소리가 났다.
철거 차량의 짐받침이 절단 장비를 실은 채 내려와 뒷문을 막았다. 돌아갈 길이 닫혔다.
김한수가 붙잡은 젖은 신문은 철문 아래에서 천천히 찢어지기 시작했다. 창고의 맨 위 신문과 운전자의 작업 지시서에는 같은 어제가 적혀 있었다.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 풀렸다 · 철거 차량 지도에서 사라진 중앙상가 주소
9화
📍 지하 철문 · 밤 · 그 사이 몇 분
이정이 종이 찢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밤의 지하 철문 안쪽에는 박철이, 문턱에는 김한수와 오미란이, 계단에는 이정과 운전자가 있었다. 내려오는 문짝이 젖은 신문을 창고와 복도 양쪽으로 당겼다.
박철이 철문 밑에 어깨를 넣고 두 손으로 밀어 올렸다. 김한수가 신문을 당기며 힘을 보탰지만 문짝은 잠깐 멎었을 뿐 올라가지 않았다. 박철은 이를 악물었다.
"종이부터 빼시오."
김한수는 찢어지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몸을 창고 안으로 굴렸다. 빠르게 빠져나가던 버릇이 이번에는 종이까지 한꺼번에 끌고 갔다. 품에서 젖은 기사와 수첩이 빠져 문턱에 쏟아졌다.
김한수는 기사를 잡지 못했다. 운전자가 먼저 펼쳐진 수첩을 내려다보았다. 그을린 첫 장에 적힌 이름이 형광등 아래 드러났다.
「박은재」
오미란은 운전자의 눈이 수첩에 묶인 동안 철문 아래로 팔을 밀어 넣었다. 하루 전 신문을 들췄으나 집어 둔 소식면은 그 아래 장에 붙어 따라오지 않았다. 대신 서로 다른 날짜가 찍힌 세 장이 펼쳐졌다.
오미란은 맨 아래 이름을 가리려다 손을 멈췄다. 세 장 모두 같은 자리에 「서말순」이 찍혀 있었다. 박철도, 김한수도, 운전자도 그 이름을 보았다. 떼어 낸 면은 한 장도 없었다.
이정은 운전자가 몸을 숙이며 작업 지시서를 계단에 내려놓는 순간 빈 주소 칸을 보았다. 종이 위로 흐린 획이 번졌다. 가방 안 소식면의 연필 이름과 같은 방향이었다. 숨을 들이켜자 운전자가 지시서를 낚아채 접었다.
박철이 마지막으로 어깨를 밀었으나 철문이 끝내 내려앉았다. 젖은 신문은 양쪽으로 갈라졌다. 박은재 기사가 찍힌 부분은 창고 안으로 끌려갔고 뒤집힌 「중앙상가」가 찍힌 부분은 복도에 떨어졌다.
김한수가 찢긴 종이를 뒤집었다. 날짜가 다른 단면마다 눌린 선이 한 줄로 이어졌다. 신문을 눌러 찍는 철판 하나가 어제와 삼십 년 전을 함께 찍은 모양이었다.
박철은 닫힌 철문 안쪽에 혼자 남았다. 문밖에서 김한수가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 대신 신문 더미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그때 운전자의 무전기가 켜졌다.
"도기석 반장 지시입니다. 주소 없어도 뒤벽부터 들어갑니다."
절단날이 상가 뒤벽을 물었다. 시멘트 계단 윗부분이 갈라져 내려앉았고 철문 안팎의 네 사람은 서로에게 가는 길부터 잃었다.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10화 · A쪽
📍 지하 철문 · 밤 · 그 사이 몇 분
박철이 작업복 안쪽에서 접힌 신문을 꺼냈다. 밤의 지하 창고에는 시멘트 가루가 비처럼 떨어졌고 철문 밖에서 세 사람이 이름을 불렀다. 절단 장비가 뒤벽을 긁을 때마다 바닥과 갈비뼈가 함께 떨렸다.
박철은 벽에서 떨어진 뾰족한 시멘트 조각을 집었다. 신문의 빈 이름 칸에는 조금 전 적은 「이 골목은 원래 없었다」가 번져 있었다. 글자가 지워지지 않도록 시멘트 끝으로 한 자씩 다시 눌러 썼다. 손에 익은 힘은 있었지만 이런 도구로 글씨를 새기는 일은 달랐다.
뒤벽 아래가 먼저 터졌다.
절단날이 창고 안으로 들어와 신문 더미의 맨 아래 장들을 잘랐다. 삼십 년 전 날짜와 어제 날짜가 한꺼번에 갈라졌고 잘린 종이가 박철의 장화 둘레로 쏟아졌다. 마른 잉크 냄새가 시멘트 먼지 사이에서 났다.
박철은 절단날이 벽 밖으로 빠지자 신문을 접어 들고 구멍으로 달려갔다. 허리를 숙이면 빠져나갈 만했다. 날이 다시 들어오기 전에 먼저 머리를 내밀 생각이었다.
두 걸음이 늦었다.
절단날이 돌아와 손에 든 신문의 가운데를 갈랐다. 박철은 팔을 거두며 창고 안쪽으로 넘어졌다. 무너진 시멘트 덩이가 구멍을 메웠고 밖으로 나갈 자리는 사람 머리도 들이밀 수 없을 만큼 좁아졌다. 문장을 남겼지만 창고에서는 빠져나가지 못했다.
잘린 신문의 안쪽 조각만 장갑에 남았다. 나머지 조각은 날이 일으킨 바람에 창고를 가로질러 철문 아래의 휜 레일로 미끄러졌고 그대로 중앙상가 복도로 빠졌다.
복도 쪽으로 넘어간 면에는 끊어진 문장이 선명했다. 그리고 빈 이름 칸 아래에서 막 올라온 두 글자도 드러나 있었다.
「이정」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 풀렸다 · 동네 소식면의 빈 이름 칸🧵 풀렸다 · 더미 둘째 장 맨 위의 새 흔
10화 · B쪽
📍 상가 뒷골목 · 밤 · 그 사이 몇 분
이정의 발치로 신문 조각이 철문 아래에서 미끄러져 나왔다. 밤의 중앙상가 복도에는 절단날이 벽을 긁는 소리와 시멘트 깨지는 소리가 번갈아 울렸다. 조각의 빈 이름 칸에는 두 글자가 찍혀 있었다.
「이정」
이정은 몸을 숙였다. 이름 아래로 이어진 인쇄판 눌림이 운전자의 작업 지시서에 번진 획과 같은 방향이었다. 사람의 이름과 비어 있는 철거 주소가 한 판에서 눌린 셈이었다. 손을 뻗기 전에 계단 위에서 시멘트 덩이가 떨어졌다.
김한수가 운전자 발치의 수첩을 낚아채 작업복 안에 넣었다. 운전자 앞에 얼굴을 세우고 말했다.
"그 이름, 잊지 마시오."
김한수는 곧장 계단을 뛰어올랐다. 오미란도 뒤따랐고, 이정은 신문 조각을 복도에 둔 채 몸을 일으켰다. 세 사람이 윗계단에 닿자 벽이 크게 갈라졌다.
김한수는 떨어지는 시멘트를 피해 난간을 넘었다. 절단 장비의 조작함까지 몇 걸음 남았을 때 계단 윗부분이 통째로 주저앉았다. 몸을 굴려 상가 뒷골목으로 빠져나왔지만 전원에는 닿지 못했다. 중앙상가 복도로 돌아갈 길도 돌무더기 아래 묻혔다.
김한수는 바닥에 엎드린 채 장비의 굵은 전원선을 좇았다. 선은 상가 배전함이 아니라 철거 차량 짐받침 아래의 보조 전원으로 이어져 있었다. 건물 불을 내려도 절단날은 멎지 않는 구조였다.
오미란은 먼지를 털 새도 없이 절단 장비 앞으로 나섰다. 운전자가 위험하다며 팔을 벌렸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사람이 안에 있어요! 이대로 자르면 당신도 책임져야 해요!"
오미란은 닫힌 지하 철문과 무너진 계단을 차례로 가리켰다. 운전자는 도기석의 지시를 되풀이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무전기를 들어 사람이 창고 안에 갇혔다고 남기고 신고 시각까지 읽었다. 이어 조작함의 붉은 비상 정지를 눌렀다.
절단날이 뒷벽에서 빠져나와 멎었다. 철거반은 장비에서 손을 떼고 차량 뒤로 물러났다. 박철의 위치를 확인할 때까지 다시 돌리지 않겠다는 말도 무전 기록에 들어갔다.
이정은 무너진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이름이 찍힌 조각은 중앙상가 복도에 남았고 이제 돌무더기 너머였다. 무엇을 본 것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운전자가 작업 지시서를 펼치자 눈길이 다시 그곳으로 갔다.
운전자는 무전으로 사고 위치를 대려다 멈췄다. 작업 지시서의 주소 칸은 비어 있었다. 사람은 안에 있는데, 신고할 건물은 지도에도 서류에도 없었다.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 풀렸다 · 날짜가 다른 신문들에 이어진 같은 인쇄판 눌림
11화 · A쪽
📍 상가 뒷골목 · 밤 · 그 사이 몇 분
박철이 장갑에 붙은 신문 조각을 떼어 작업복 안쪽에 넣었다. 지하 창고의 뒤벽에서는 시멘트 덩이가 잇달아 내려앉았고 돌 아래 눌린 신문은 길게 찢어졌다. 남은 구멍도 곧 묻힐 참이었다.
박철이 가장 큰 덩이 아래로 몸을 낮췄다. 예전에 철문을 들어 올렸던 쪽 어깨를 대고 두 발로 바닥을 밀었다. 처음에는 가루만 떨어졌다. 숨을 짧게 끊어 다시 밀자 서로 맞물린 시멘트가 통째로 들렸다.
박철이 등을 굽혀 무게를 받으며 오른손을 돌 아래로 넣었다. 신문 묶음이 손에 잡혔다. 당기면 종이가 찢어지고 힘을 늦추면 벽이 내려왔다. 그래서 어깨로 돌을 더 들어 올린 뒤 신문을 한꺼번에 끌어냈다. 눌려 있던 묶음이 찢어지지 않은 채 바닥으로 빠져나왔다.
박철이 신문을 품에 안고 열린 자리로 머리를 밀어 넣었다. 구멍은 사람이 겨우 기어갈 넓이였으나, 어깨를 틀자 받침처럼 걸렸던 돌까지 옆으로 넘어갔다. 몸을 끌어내고 신문 묶음도 놓치지 않았다. 목표했던 것보다 넓은 길이 열렸다.
박철이 상가 뒷골목 쪽 땅을 짚고 일어났다. 그 순간 뒤벽이 내려앉았다. 방금 지난 구멍과 남은 신문은 시멘트 아래에 완전히 묻혔고 지하 창고로 돌아갈 길은 사라졌다.
박철이 품의 묶음을 펼쳤다. 닫힌 철문 안에서 들렸던 때와 똑같이 신문 세 장이 저절로 넘어갔다. 사람 손이 닿지 않았는데 종이가 넘어가는 일은 정상이 아니었다. 세 장의 발행일이 차례로 흐려지더니 모두 하루 뒤 날짜로 바뀌었다.
박철이 마지막 장을 붙잡았다. 동네 소식면의 이름 칸은 온전했고 「이 골목은 원래 없었다」를 다시 적을 자리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빈 칸 한가운데에서 새 잉크가 번졌다.
「박」
첫 글자가 절반까지 찍혀 있었다.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 풀렸다 · 닫힌 철문 안쪽에서 세 장 넘어간 신문 소리
11화 · B쪽
📍 중앙상가 복도 · 밤 · 그 사이 십여 분
오미란이 운전자의 손을 작업 지시서 위에 눌렀다. 밤의 상가 뒷골목에는 보조 전원이 낮게 울렸고 멎은 절단날에서 시멘트 가루가 떨어졌다. 운전자가 종이를 빼려 하자 더 세게 눌렀다.
"주소를 모르겠으면 건물 이름부터 적어요. 중앙상가, 사람 하나가 그 안에 있다고요."
김한수가 그사이 지시서와 펜을 낚아챘다. 운전자가 빈칸을 가리며 팔을 뻗었지만 오미란이 몸으로 앞을 막았다. 김한수는 사고 위치 칸에 펜촉을 눌렀다.
"주소가 없으면 건물 이름부터 적어."
「중앙상가 지하 창고」
그 아래에 「박철」까지 적었다. 운전자는 끝내 지시서를 되찾지 못했다. 무전기를 들고 적힌 내용을 그대로 읽었고 사고 위치와 구조 대상의 이름이 철거반 기록에 접수됐다. 주소 불명으로 남을 자리는 사라졌다.
김한수는 무전기에서 흘러나온 말을 놓치지 않았다. 운전자의 호출부호는 「철거 삼호」였고 현장 책임자는 오 분 뒤 도착한다고 답했다. 펜을 내려놓은 뒤에야 오미란의 팔이 떨리는 것을 보고 지시서를 대신 받아 들었다.
이정은 철거 차량 불빛 밖에 서 있었다. 잠시 뒤 박철이 신문 묶음을 안고 나타나자 먼저 종이부터 보았다. 동네 소식면 한가운데에 「박」 자가 절반까지 찍혀 있었다. 조금 전 중앙상가 복도에 남겨 둔 자신의 이름 조각과 번지는 방향이 같았다.
가방 끈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미란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요?"
이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박철의 소식면만 가만히 보았다. 그 침묵 때문에 오미란도 종이 위의 「박」 자를 보게 됐다.
현장 책임자는 약속한 시각보다 먼저 승합차에서 내렸다. 무전 기록과 지시서를 번갈아 읽은 뒤, 구조 대상이 확인됐으니 자정부터 철거를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했다. 남은 시간은 십오 분이었다.
현장 책임자는 넷을 데리고 앞 출입구로 돌아 중앙상가 복도에 들어갔다. 무너진 계단과 닫힌 지하 철문을 직접 보려는 참이었다. 김한수가 기록 사본을 챙겼고 오미란은 박철 곁에서 신문 묶음을 붙들었다.
이정은 복도 형광등 아래에서 소식면을 다시 보았다. 반쯤 찍힌 「박」 자의 잉크는 마르지 않았다.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 풀렸다 · 비상 정지 기록의 빈 사고 위치 칸
12화
📍 상가 뒷골목 · 밤 · 그 사이 십오 분
이정이 무전기의 전자음에 고개를 들었다. 자정 직전의 중앙상가 복도에는 네 사람과 현장 책임자가 모여 있었다. 무너진 계단 너머에서 시멘트가 무너졌고 상가 뒷골목의 보조 전원은 벽을 낮게 울렸다.
박철이 책임자의 눈이 무전기로 향한 순간 소식면을 반으로 접었다. 젖은 「박」 자가 안으로 들어갔다. 작업복 앞섶에 종이를 밀어 넣고는 셔터가 열린 빈 가게로 몸을 돌렸다.
김한수가 곁으로 붙어 펜을 꺼냈다. 책임자가 고개를 들었을 때는 두 사람의 등이 소식면을 가리고 있었다. 박철을 따라온 일이 오히려 종이를 숨겨 준 셈이었다.
박철이 빈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김한수가 접힌 면을 붙잡고 펜촉을 댔다. 「박」 뒤에 획 하나가 생기기 전에 종이가 빠져나갔다. 펜까지 빼앗아 든 박철은 계산대에 소식면을 펴고 이름 칸을 눌러 썼다.
「이 골목은 원래 없었다」
문장이 젖은 「박」 자를 덮었다. 박철은 새 이름이 완성되기 전에 골목 문장을 끝까지 적었다.
김한수가 작업복을 다시 붙잡았지만 소식면에는 닿지 못했다. 벌어진 앞섶에서 흰 봉투 모서리가 튀어나왔다. 손을 뻗는 사이 박철이 팔꿈치로 옷깃을 눌렀고 봉투는 도로 안으로 들어갔다. 「박은재」는 쓰지 못했다.
오미란이 접혀 들어가는 소식면 아래쪽을 놓치지 않았다. 두 손으로 「서말순」이 찍힌 부분을 잡고 인쇄선을 따라 찢었다. 다른 이름은 상하지 않았다. 조각을 카디건 안주머니에 넣는 모습이 이정에게 보였다.
이정이 빈 가게의 열린 뒷문 앞으로 갔다. 문밖에는 상가 뒷골목의 오래된 우편함이 붙어 있었다. 소식면이 잠깐 펴졌을 때 이름 칸과 우편함 옆 벽의 종이 자리가 같은 크기로 포개졌다. 눌린 방향도 같았다.
현장 책임자가 철거 차량의 지도 화면을 다시 켰다. 조금 전까지 차량이 들어온 상가 뒷골목의 선이 사라져 있었다. 직접 서 있는 길이 지도에서 지워진 일은 정상이 아니었다.
현장 책임자가 자정을 알리고 무전으로 재개 명령을 내렸다. 보조 전원이 높게 울더니 절단날이 다시 돌았다. 벽 안쪽에서 콘크리트가 깨지기 시작했고 빈 가게 천장에서 가루가 쏟아졌다. 네 사람은 뒷문으로 밀려나갔다.
오미란은 상가 뒷골목에 닿자 안주머니를 눌렀다. 「서말순」이 찍힌 조각은 건물 밖으로 나왔다. 박철은 접힌 소식면과 흰 봉투를 작업복 안에 둔 채 우편함 앞에 섰고 김한수는 바로 뒤에서 그 옷깃을 보고 있었다.
이정이 우편함 옆 벽과 네 사람의 종이를 차례로 보았다. 절단날은 벽 반대편에서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름 칸과 꼭 맞는 오래된 종이 자리부터 금이 갔다.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 풀렸다 · 우편함 옆 벽의 소식면 흔적🧵 풀렸다 · 구해 낸 소식면에 절반까지 찍힌 「박」 자
13화
📍 상가 뒷골목 · 밤 · 그 사이 몇 분
오미란이 우편함 옆 벽으로 달려갔다. 절단날은 빈 가게 안쪽 시멘트를 깨며 가까워졌고 비에 불은 풀이 손톱 밑에 묻었다. 박철도 작업복에서 접힌 소식면을 꺼내 같은 자리로 뛰어들었다.
"이것까지 없어지게 둘 순 없어."
오미란이 오래된 종이층을 긁어 들자 박철이 그 위에 소식면을 덮었다. 손톱으로 종이를 잡아당겼지만 박철은 젖은 풀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가운데부터 바깥으로 밀어붙였다. 「이 골목은 원래 없었다」가 적힌 면이 벽에 완전히 달라붙었다.
오미란은 종이 아래로 손톱을 한 번 더 넣었다. 하지만 떼어 낸 것은 풀 묻은 종이 섬유 한 조각뿐이었다. 오래된 종이 자리는 건져 내지 못했다.
김한수가 박철의 팔이 벽으로 뻗은 순간 작업복 앞섶에 손을 넣었다. 접힌 소식면과 걸려 있던 흰 봉투가 먼저 딸려 나왔고 봉투만 낚아채 골목 입구로 달렸다. 박철이 돌아섰을 때는 철거 차량의 불빛 너머였다.
김한수는 봉투를 찢지 않고 젖은 덮개를 벌렸다. 안쪽 쪽지도 온전했다. 박은재라는 이름은 없었다.
「새벽 전까지 일을 마치면 밀린 월세는 없던 것으로 한다.」
현장 책임자가 어깨너머로 그 글을 읽었다. 김한수는 봉투와 쪽지를 접지 않은 채 들었다. 이제 박철이 되찾아 없앨 수 없는 증거였다.
박철은 쪽지보다 벽을 먼저 보았다. 붙인 소식면 아래로 금이 뻗었다. 곧 절단날이 시멘트를 뚫고 나왔고 우편함이 크게 울렸다.
벽 한 덩이가 골목 쪽으로 무너졌다.
오미란이 뒤로 물러나며 주먹을 쥐었다. 풀 묻은 종이 섬유만 손안에 남았다. 우편함 옆의 오래된 종이 자리는 소식면과 함께 시멘트 아래로 들어갔다.
이정은 현장 책임자가 떨어뜨린 작업 지시서 사본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적혀 있던 「중앙상가 지하 창고」가 빗물처럼 번져 사라졌다. 철거 차량 지도에서도 상가 뒷골목 진입로가 지워졌다. 사람들이 서 있는 골목을 오늘의 기록만 찾지 못했다.
우편함 철판의 울림이 멎었다.
이정만 작업 지시서의 빈 주소 칸을 보고 있었다. 아무도 펜을 대지 않았는데 연필로 누른 듯한 둥근 획이 새로 찍혔다. 가방 안쪽 소식면에 적힌 자기 이름의 첫 획이었다.
김한수가 굳은 얼굴을 보고 불렀다.
"이정 씨."
이정은 대답하지 못했다. 빈 주소 칸에서는 다음 획이 번지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 풀렸다 · 작업 지시서 사본에 눌러쓴 「중앙상가 지하 창고」
14화
📍 상가 뒷골목 · 밤 · 그 사이 몇 분
이정이 작업 지시서를 집어 들자 두 번째 획이 번졌다. 절단날이 우편함 아래의 벽을 다시 찍었고 그 소리와 함께 이름의 나머지 획이 한꺼번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가방 안쪽에서도 종이가 젖는 소리가 났다.
오미란이 이정의 손목을 잡고 작업 지시서를 빼앗았다.
"이름이 다 나오기 전에 여기서 나가야 해."
오미란은 무너진 벽을 돌아 상가 뒷골목을 빠져나갔다. 철거 차량과 담장 사이로 몸을 밀어 넣고 큰길까지 달렸다. 빈 주소 칸에는 「이」 자만 찍힌 채였다.
김한수는 박철이 옆구리에 낀 신문 묶음에서 안쪽 면을 뽑았다. 박철의 장갑에 붙어 있던 잘린 조각도 함께 떨어졌고 찢어진 두 종이를 맞대자 「박은재」가 하나로 이어졌다. 김한수는 오미란을 따라붙어 달리며 작업 지시서 위에 그 면을 덮었다.
"이번에는 네 이름을 놓치지 않아."
김한수가 두 종이의 빈칸을 정확히 포갰다. 이정의 다음 획은 더 번지지 않았다. 덮었던 면을 들자 작업 지시서에는 「박은재」의 눌린 글씨와 우편함 옆 종이 자리의 네모난 테두리가 함께 남았다. 묻혀 버린 자리에 이름 하나를 다시 댈 수 있었다.
박철은 그사이 보조 전원 앞으로 달려갔다. 신문 묶음을 옆구리에 낀 채 장갑으로 뜨거운 전선 묶음을 움켜쥐고 몸을 뒤로 실어 단자에서 뽑아냈다. 불꽃이 튀었지만 두 손은 놓치지 않았다.
절단날이 멎었다.
이정은 가방 안쪽 소식면을 꺼냈다. 작업 지시서와 똑같이 「이」 자가 찍혀 있었고 두 종이의 잉크는 같은 자리에서 멈췄다. 김한수와 박철이 그 종이를 보았고 오미란도 큰길에서 돌아와 발을 멈췄다. 창고의 빈칸이 가까이 온 사람의 이름을 받아 적고 있었다.
김한수는 박은재 면을 접지 않았다.
"삼십 년 전부터 이 이름을 찾았어요."
오미란도 카디건 안주머니에서 「서말순」 조각을 꺼냈다.
"서말순은 우리 엄마예요."
오미란은 작업 지시서를 들고 우편함 앞으로 돌아왔다. 절단날이 멈춘 덕에 오래된 종이 자리의 아랫부분은 시멘트 밖에 남아 있었다. 그 앞에 박은재의 면, 서말순의 조각, 이정의 소식면이 놓였다.
박철은 김한수가 든 월세 쪽지를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붙여 버린 골목 문장 대신 전원을 끊었고 이정의 이름은 끝까지 찍히지 않았다. 셋이 한 사람을 살리려 서로 다른 곳으로 달린 일이 한자리에서 맞물렸다.
그때 지하 철문 안에서 신문이 넘어갔다. 보조 전원은 끊겼는데도 소리는 멎지 않았다. 사람 손도 전기도 없이 종이가 넘어가는 일은 정상이 아니었다.
우편함 옆의 젖은 풀이 박은재 면을 천천히 당겼다. 세 이름 가운데 하나만 들어갈 자리였다.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 풀렸다 · 기사 본문에 반복 인쇄된 박은재🧵 풀렸다 · 어제 날짜와 빈 주소 칸이 적힌 철거 작업 지시서🧵 풀렸다 · 박철의 장갑에 남은 잘린 신문 안쪽 조각
15화
📍 상가 뒷골목 · 밤 · 그 사이 십여 분
이정이 가방 속 소식면을 펼쳤다. 상가 뒷골목의 우편함 앞에는 박은재 면과 서말순 조각이 놓였고 네 사람 뒤에서는 철거반이 새 전선을 끌고 왔다. 멈췄던 「이」 자는 종이들이 움직일 때마다 다른 방향으로 번졌다.
오미란이 시멘트에 붙어 가는 박은재 면 아래로 손톱을 넣었다. 젖은 풀이 길게 늘어났지만 종이는 찢어지지 않았다. 떼어 낸 면을 김한수에게 넘기고 빈 자리에 서말순 조각을 눌렀다.
"엄마는 이번에도 없어지지 않아."
김한수는 박은재 면을 받아 무너진 중앙상가 복도 아래로 뛰었다. 오미란이 붙잡은 것은 자리였고 김한수가 가져간 것은 이름이었다. 둘은 서로 묻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엇갈리지 않았다.
박철이 먼저 지하 철문에 닿았다. 떨어진 철근을 휘어진 아래 레일에 박고 어깨로 눌렀다. 녹슨 문이 벌어지자 안에서 신문이 넘어가는 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김한수가 열린 틈으로 박은재 면을 밀어 넣었다. 안쪽 더미의 맨 위 장이 저절로 들리며 종이를 끌어당겼다. 사람 손 없이 신문이 다른 신문을 잡아당기는 일은 정상이 아니었다. 박은재 면의 뒷면에 어제 날짜가 거꾸로 눌렸다.
박철이 철근을 밟고 창고 안으로 들어가 더미를 두 팔로 눌렀다. 들리던 장이 절반쯤 선 채 멈췄고 김한수는 박은재 면을 밖으로 빼냈다. 철문도 더 닫히지 않았다.
오미란은 서말순 조각의 네 귀퉁이를 차례로 눌렀다. 이름이 오래된 종이 자리에 완전히 붙자 이정의 소식면에서 번지던 획이 사라졌다. 김한수가 가져온 박은재 면에서도 이름 둘레의 젖은 눌림만 남았다.
이정이 두 종이를 나란히 놓았다. 조금 전까지 이름의 위치를 따라 움직이던 획이 서말순 앞에서 한 방향으로 굳었다. 김한수가 그 손을 보고 박은재 면을 접지 않은 채 내려놓았다.
그때 철거반이 새 전선을 보조 전원에 연결했다. 절단날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박철이 창고에서 빠져나오자 네 사람은 우편함 앞으로 돌아왔다. 현장 책임자가 들고 있던 작업 지시서의 주소 칸에는 「중앙상가 지하 창고」가 다시 찍혀 있었다. 무전 사고 기록에도 같은 이름과 박철이 남았다.
복도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낡은 간판도 시멘트 가루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지워졌던 「중앙상가」가 돌아와 있었다.
다만 우편함 옆에는 서말순만 남았다. 날짜는 어제였다.
이 장면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 풀렸다 · 떨어진 간판
에필로그
## 전말
박철과 이정, 김한수, 오미란은 자정이 지난 상가 뒷골목의 우편함 앞에 있었다. 네 사람은 중앙상가와 자신들의 이름을 오늘에 남겼다. 대신 서말순의 이름 하나를 어제에 두었다. 김한수는 박은재의 이름이 찍힌 신문을 오늘로 가져왔다.
김한수는 삼십 년 동안 박은재를 찾았다. 박은재는 삼십 년 전 동네 소식면에 이름이 실린 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날 지하 철문이 닫혔다. 박은재의 이름은 중앙상가까지 어제에 붙들어 두었다.
지하 창고의 시간은 언제나 바깥의 어제였다. 철문이 잠긴 동안에도 신문 날짜는 날마다 바뀌었다. 소식면에 이름이 실리면 그 사람은 오늘의 기억에서 지워졌다. 빈 이름 칸은 창고에 가까이 온 사람의 이름을 받아 적었다.
이정은 우편함에서 자기 이름이 적힌 소식면을 주웠다. 한 달 전 철문 앞에 오래 머문 뒤부터 빈 칸이 이정의 이름을 받아 적고 있었다. 작업 지시서의 주소 칸에도 같은 획이 번졌다. 김한수가 박은재 면으로 그 자리를 덮고 오미란이 서류를 큰길로 옮기자 이름은 끝까지 찍히지 않았다.
박철은 밀린 월세를 없애려고 「이 골목은 원래 없었다」를 빈 칸에 적었다. 그 문장이 완성되자 안내판과 지도와 철거 기록에서 중앙상가가 사라졌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월세 약속을 버리고 절단 장비의 전원을 끊었다. 창고 신문도 몸으로 눌러 새 이름이 찍히는 일을 막았다.
오미란은 이름을 잃은 서말순의 딸이었다. 서말순은 이 년 동안 여러 날짜의 같은 자리에 거듭 찍혔다. 오미란은 우편함 옆 자리에 어머니의 이름을 붙였다. 그 자리가 서말순을 받자 박철의 문장은 힘을 잃었고 중앙상가의 이름이 오늘 기록에 돌아왔다.
김한수는 박은재 면을 지하 철문 안에 넣었다가 다시 꺼냈다. 뒷면에 거꾸로 찍힌 어제 날짜는 철문 너머의 시간이 그대로 남았다는 뜻이었다. 신문을 넘기고 이름을 끌어당긴 힘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 힘은 빈자리에 새 이름을 넣어 창고의 어제를 이어 가고 있었다.
네 사람의 선택은 오늘에 남을 이름을 바꿨다. 이정과 박철은 지워지지 않았다. 김한수는 박은재의 이름을 기억할 종이를 얻었다. 중앙상가는 다시 기록에 남았다. 서말순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어제의 신문에서 이름을 잃지 않았다.
## 그 후
박철은 몇 년 뒤에도 무거운 상자를 보면 먼저 장갑을 꼈다. 흰 봉투를 다시 찾지는 않았다. 어느 날 이정에게 전화를 대신 받아 줘서 고마웠다고 말했다.
김한수는 몇 년이 지나도 수첩 첫 장을 비워 두지 않았다. 박은재의 이름과 어제 날짜를 나란히 적어 두었다. 박철은 그 글씨를 보고 계단에서 불러세웠던 아이가 김한수였다는 것을 떠올렸다.
이정은 몇 년 뒤에도 국물 냄비의 불을 끌 때마다 자기 이름을 소리 내어 말했다. 누가 이름을 부르면 바로 돌아보았다. 오미란이 돌려준 죽그릇은 부엌 선반에 두었다.
오미란은 상가가 사라진 뒤에도 그 골목에 고양이 밥그릇을 놓았다. 비가 오면 우편함이 있던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서말순이라는 이름을 매번 또렷하게 말했다.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다음 날이 오면 다시 이름을 불렀다.
주사위는 코드가 굴리고, 점선이 그어진 말은 사람이 쓴 문장 그대로입니다.